구암서원 (龜巖書院)


구암서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전 연귀산 기슭)에 있는 서침ㆍ서거정ㆍ서해ㆍ서성을 4인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서씨는 이천서씨의 시조 서신일의 후손으로 짐작되고 있다. 서신일은 기자의 42세손인 기준(애왕)의 후손이 된다는데 고대 기씨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9세기 중엽 위만에게 쫓겨 지금의 이천땅 서아성에 자리잡은 것이 서씨의 시초라고 한다.


신라 때에 이르러 개국공신 아성대장군 서두라가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신라 말기에 아간 서신일이 있었고 고려 초기에 서목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왕건)가 남정할 때 태조를 받들어 대천이 한천을 잘 건너게 했다는 공로로 이천백의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천서씨는 모두 그 후손이며 달성·장성·연산·평당·남평·남양 등 7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모두 서신일이 후손이라고 한다.


달성 서씨의 시조 진(판도공)은 고려 때 봉입우 대부,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공이 있어 달성(대구의 고호)군에 봉해지고 달성 (신라때는 달구화성, 지금은 대구 달성 공원)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세거하게 되었으며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달성서씨로 통칭되는 대구서씨가 있는데 이 두 씨족은 관향이 같은 지역이라는 점으로 보아 같은 혈손으로 생각되나 확실한 고증 자료가 없어서 합보를 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대구서씨 시조 한은 고려 때 조봉대부 군기소윤(소윤공)을 지냈으며 오대의 세계가 실전되어 자세하지 않다. 7세 익진의 증손 서거정 등 많은 인물을 낸 명문으로 대구에 세거했기 때문에 본관을 대구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달성 서씨는 서울에 올라와 벼슬을 지낸 경파와 고향에 남아 고향을 지키며 벼슬과는 별반 인연이 없이 지내 온 집안인 향파가 있는데 경파는 서한의 6대손인 서익진 (고려-판전)을 향파는 서진(고려-판도판서)을 각각 시조로 하고 오늘날에도 대동보 마저 따로따로 만들고 있다. 서씨는 대종이 이천서씨이지만 명벌로 빼어난 집안은 6대에 걸쳐 삼정승에 삼대제학을 지낸 대구서씨 뿐이다.


경파는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높은 벼슬로 영달하게 되자 족보를 편찬하면서도 고향의 일족은 내버려둔 채 자기들끼리만 족보를 꾸몄다는 것이 향파측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세계상으로는 향파가 큰 집이 된다고 한다.


지금도 대구와 달성이 족보를 각각 달리하고 있다. 선조들이 명확한 고증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근거를 찾지 못해 숙종 28년에 향파를 편말에 부치고 경파만을 중심으로 임오보의 첫 간행을 보게 된 것이 갈라진 시초라고 보아진다. 서씨로 첫 영의정을 지낸 공숙공 서문중이 족보를 간행하면서 향파와 합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조 방목(과거에 급제한 사람명단) 등 각종 문헌은 관향을 모두 달성으로 쓰고 있다. 경파는 조선조에 명문대가로 흥성이 극에 달했고 향파는 지방 선비의 집안으로 세도의 많은 차이를 가져온 것이 갈라진 큰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한 듯하다.


대구서씨는 고려조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조선조에 들어 서거정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의 세력을 떨쳤으며 선조·인조때의 서성이 5도관찰사 3조판서를 지내면서 가문의 기반을 구축하고 그의 네 아들을 비롯한 자손 중 삼대 정승에 삼대 대제학 3대 대학자가 계속 배출되기에 이르러 1백여 년에 걸쳐 가장 현달한 가문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현 대구 국교 서남쪽 언덕)기슭에 숭현사를 세워 서침을 봉향하였다.


대구부민이 서침을 숭현사에 봉향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서침은 달성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현 달성공원)에 살았는데 1424년(세종6)달성(서씨소거)이 천참가성이므로 성터로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달성서씨들에게 다음과 같은 양도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연신지(영선못:현재의 영선시장 자리)와 신지(현재의 서문시장)일대의 몽리토지에 대한 세금을 국가가 받는 대신 달성서씨들이 받을 것, 둘째: 남산역(전 남산 병원 일대)과 동산일대와 바꿀 것, 셋째: 후한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성서씨 주손 침은「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어찌 그 대가를 바라겠습니까」하고 사양하였다.


그의 뜻을 전해들은 세종은 매우 기특히 여기면서 달리 소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서침은 일가가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보다는 백성들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대구 지방에서 바치는 환곡리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 주옵소서」라고 상소하였다. 세종은 그 소청을 윤허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환곡 이자를 한 섬당 1말 5되를 받았는데 대구 지방에 한해서는 당시 한 섬에 1말 5되씩 받던 환곡의 이자를 5되를 감하고 이자 1말씩만 받도록 하였다. 그 뒤 이 지방 백성들은 5백년 동안 그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이 서침의 은덕을 입은 대구부민들이 서침의 갸륵한 자선혁덕을 기르기 위해 1665년(현종 6년)에 귀암사로 창건하였으나 언제 서원으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1675년(숙종 원년) 음 3월29일 유림에서 서침을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다가 1717(숙종 43)에 현재의 동산동 귀암상에 이건 시공하여 이듬해 1718년(숙종 44)3월 6일에 완공하였다. 이때 서침과 소윤공 서한의 후손인 서거정을 합향하였고, 1741년(영조 17) 2월20일에 역시 서한의 후손인 서성과 1757년(영조 33) 8월 26일 영의정을 지낸 서해를 추향하였다. 이렇게 해서 서침·서거정·서해·서성 4인을 배향하게 된 것이다. 1709년 (정조 4) 강당을 수리하였으며 1795년에 숭현사를 중건하였다.


구암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3년 종중에서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46년에 대종회 결의로서 향사를 지내다가 1970년 중단되었다. 1974년 8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암서원 숭현사(龜巖書院 崇賢祠

)

지정 번호 : 문화재 자료 2호

소 유 자 : 사유(달성서씨대종회)

소 재 지 : 중구 동상동 229

지정년월일 : 1975년 2월 5일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連龜山

-현 대구초등학교 서남쪽 언덕)에 건립되었고, 숙종 44년(1718) 현재의 동산동으로 이건(移建

)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毁撤

)되었다. 그 후 1924년 유림에서 재건하고 1943년 중수하였으며, 1974년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암서원은 신명여고 운동장 우측 언덕 아래에 북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입구의 경앙문(景仰門

)을 들어서면 우측에 유허비각(遺墟碑閣

)이 있고 맞은 편에 강당이 있으며, 강당 우측에 사당이 있고 그 뒷편에 제수청이 있다. 숭현사(崇賢祠

)는 강당 바로 후방에 3m쯤 떨어져 있으며, 뒷면은 신명여고 언덕이 막아 섰고 3방(方

)은 기와얹은 죽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출입문은 전면담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대구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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