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정광태라는 개그맨 출신 가수가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제는 금지곡에서 풀렸지만 일본이 항의를 하면 가끔씩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2. 2000년 새해맞이 해돋이 행사는 각 나라의 가장 동쪽 끝 영토에서 실시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가장 동쪽 끝 영토인 독도를 팽개치고 울산광역시의 간절곶 등대에서 새천년 해돋이 채화식을 거행했다. 

(실제로 방송국은 독도에서 행사를 거행하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한다. 왜??) 

3. 대한민국의 영토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하지만 독도는 일반 한국인이 접근할 수 없는 섬으로 지정되어있다. 일반인이 독도에 들어가려면 외교통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요청시 대부분 반려되고 있다. 

(천연기념물 보호때문이라는데 언제부터 외교통상부가 천연기념물을 관리했나.) 

4.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와 가장 가까운 시마네현 은기군 오개촌에 편입시켜 놓았으며 독도에 일본인 호적까지 등록시켜 놓았다. 

게다가 일본 시마네현 청사와 경찰청 정문앞에는 

`죽도는 우리(일본) 고유 영토입니다’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과 시마네현 곳곳에는 죽도는 우리(일본) 땅’이라는 현수막까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어느 청사에도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입간판이나 현수막은 없다. 

5. 일본 시마네현 관청은 독도의 공시지가까지 마련해 놓았으나 

울릉군청에는 독도의 공시지가따위는 없다. 

6. 1999년 말 경북도지사는 독도의 해경을 위로 방문하려고 정부에 출장신청을 했으나 고위층의 반대로 출장은 무산되었다. 

(일반인은 물론 독도를 관할하는 책임자인 경북도지사도 지맘대로 못간다.) 

7. 일본은 1996년 신어업협정을 발효시키며 배타적 경제 수역 내에 독도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한국의 애걸복걸로 독도는 중간수역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한국 어선이 조업시 독도에 정박하는 것은 발포를 무릅써야 한다. 

(독도에 있는 경찰은 일본 경찰인가?) 

8. 1996년 한 홍콩의 경제주간지가 아시아 기업인들 상대로 `독도영유권`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말레이시아 기업인들은 66.7%, 호주 58.8%, 인도 55.6% 필리핀의 기업인들은 54.5%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독도를 한국땅으로 알고 있는 것인가?) 

9. 김종필 전 자민련총재가 62년 한·일 국교정상화교섭 당시 독도 폭파를 일본측에 제안했던 사실이 확인됐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워싱턴발 지지 통신을 인용,보도했다. 

이 신문은 최근 해금된 미 외교문서에 한국측 수석대표였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독도 폭파를 제안했으나 일본측이 거부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므로 쉽게 폭파하자는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영토를 폭파할 수 없어서 거부했다는 식으로 해석함.) 

10. 정부는 유엔해양법협약 관련규정에 따라 현재 독도를 EEZ를 가지지 않는 [암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 (98. 11. 8, 국회대정부 질의시 국무총리 답변) 

하지만 일본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이지만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것 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0.23평방 km 짜리 암석도 있나? 암석치고는 꽤 크군.) 

11. 남지나해의 [남사군도]는 필리핀, 중국, 베트남, 브루나이, 대만 등 여러나라 간의 분쟁이 일고 있는 지역이다. 

몇 년 전 중국 해군이 그 중의 한 산호초에 가건물을 지었다. 

그 산호초는 필리핀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전임 라모스 정권 때는 별 소용도 없는 외교적 항의로만 일관했다. 

그러니 중국은 끄떡도 할 리 없었다. 

그러나 에스트라다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 후에 

필리핀 해병대를 보내서 중국이 지은 가건물을 통쾌하게도 폭파해 버렸다. 

중국과의 전쟁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지레 찔린 중국은 필리핀에 쳐 들어가기는 커녕, 

여태 자기 영토, 영해라고 주장하던 자세를 바꾸어 

공동관리라는 선까지 후퇴했다. 

(일본이 언젠가 독도 수비대 숙소를 폭파하러 올 것이다.) 

12. 현재 독도에는 독도 수비대라는 명칭의 전투경찰이 있다. 

국방은 군인이 지키고 치안을 담당하는 게 경찰이다. 

독도는 당연히 전경대신 해병대가 지키고 있어야한다. 

일본은 독도주변 영해와 영공에 일본의 군함과 선박, 항공기를 

자주 출몰시키고 있다. 

한국은 독도를 경찰이 담당하지만 일본은 자위대라는 군대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거 봐~ 일본이 곧 폭파하러 온다니까) 

13. 동해바다 명칭이 일제시대 이전에는 `Mer de coree` 등 

`조선해`의 영문명칭으로 널리 알려지다가 일제시대 이후 

전세계의 대부분의 지도에선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한국해라고 항의하기는커녕 

맑고 푸른바다라는 뜻의 청해(淸海)로 표기하자고 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를 거절하고 있다. 

지도에 일본해에 떠있는 섬을 한국 영토라고 한다면 

전세계 누가 믿어주겠는가? 

* 맺음말 - 

독도는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암석덩어리가 아닌 피같은 영토다. 

한국의 영토임을 전세계에 널리 홍보하고 일본에게는 항의 정도가 아닌 강력한 경고를 해야 한다. 

이 상태로 몇년만 지나면 전세계에서 우리만 바보 되는 것이다. 

남의 땅을 버젓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꼴이 될테니 말이다.

어디선가 퍼온 내용인데 ... 참 와닿는 내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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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정광태라는 개그맨 출신 가수가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제는 금지곡에서 풀렸지만 일본이 항의를 하면 가끔씩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2. 2000년 새해맞이 해돋이 행사는 각 나라의 가장 동쪽 끝 영토에서 실시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가장 동쪽 끝 영토인 독도를 팽개치고 울산광역시의 간절곶 등대에서 새천년 해돋이 채화식을 거행했다. 

(실제로 방송국은 독도에서 행사를 거행하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한다. 왜??) 

3. 대한민국의 영토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하지만 독도는 일반 한국인이 접근할 수 없는 섬으로 지정되어있다. 일반인이 독도에 들어가려면 외교통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요청시 대부분 반려되고 있다. 

(천연기념물 보호때문이라는데 언제부터 외교통상부가 천연기념물을 관리했나.) 

4.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와 가장 가까운 시마네현 은기군 오개촌에 편입시켜 놓았으며 독도에 일본인 호적까지 등록시켜 놓았다. 

게다가 일본 시마네현 청사와 경찰청 정문앞에는 

`죽도는 우리(일본) 고유 영토입니다’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과 시마네현 곳곳에는 죽도는 우리(일본) 땅’이라는 현수막까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어느 청사에도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입간판이나 현수막은 없다. 

5. 일본 시마네현 관청은 독도의 공시지가까지 마련해 놓았으나 

울릉군청에는 독도의 공시지가따위는 없다. 

6. 1999년 말 경북도지사는 독도의 해경을 위로 방문하려고 정부에 출장신청을 했으나 고위층의 반대로 출장은 무산되었다. 

(일반인은 물론 독도를 관할하는 책임자인 경북도지사도 지맘대로 못간다.) 

7. 일본은 1996년 신어업협정을 발효시키며 배타적 경제 수역 내에 독도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한국의 애걸복걸로 독도는 중간수역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한국 어선이 조업시 독도에 정박하는 것은 발포를 무릅써야 한다. 

(독도에 있는 경찰은 일본 경찰인가?) 

8. 1996년 한 홍콩의 경제주간지가 아시아 기업인들 상대로 `독도영유권`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말레이시아 기업인들은 66.7%, 호주 58.8%, 인도 55.6% 필리핀의 기업인들은 54.5%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지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독도를 한국땅으로 알고 있는 것인가?) 

9. 김종필 전 자민련총재가 62년 한·일 국교정상화교섭 당시 독도 폭파를 일본측에 제안했던 사실이 확인됐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워싱턴발 지지 통신을 인용,보도했다. 

이 신문은 최근 해금된 미 외교문서에 한국측 수석대표였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독도 폭파를 제안했으나 일본측이 거부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므로 쉽게 폭파하자는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영토를 폭파할 수 없어서 거부했다는 식으로 해석함.) 

10. 정부는 유엔해양법협약 관련규정에 따라 현재 독도를 EEZ를 가지지 않는 [암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 (98. 11. 8, 국회대정부 질의시 국무총리 답변) 

하지만 일본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이지만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것 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0.23평방 km 짜리 암석도 있나? 암석치고는 꽤 크군.) 

11. 남지나해의 [남사군도]는 필리핀, 중국, 베트남, 브루나이, 대만 등 여러나라 간의 분쟁이 일고 있는 지역이다. 

몇 년 전 중국 해군이 그 중의 한 산호초에 가건물을 지었다. 

그 산호초는 필리핀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전임 라모스 정권 때는 별 소용도 없는 외교적 항의로만 일관했다. 

그러니 중국은 끄떡도 할 리 없었다. 

그러나 에스트라다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 후에 

필리핀 해병대를 보내서 중국이 지은 가건물을 통쾌하게도 폭파해 버렸다. 

중국과의 전쟁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지레 찔린 중국은 필리핀에 쳐 들어가기는 커녕, 

여태 자기 영토, 영해라고 주장하던 자세를 바꾸어 

공동관리라는 선까지 후퇴했다. 

(일본이 언젠가 독도 수비대 숙소를 폭파하러 올 것이다.) 

12. 현재 독도에는 독도 수비대라는 명칭의 전투경찰이 있다. 

국방은 군인이 지키고 치안을 담당하는 게 경찰이다. 

독도는 당연히 전경대신 해병대가 지키고 있어야한다. 

일본은 독도주변 영해와 영공에 일본의 군함과 선박, 항공기를 

자주 출몰시키고 있다. 

한국은 독도를 경찰이 담당하지만 일본은 자위대라는 군대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거 봐~ 일본이 곧 폭파하러 온다니까) 

13. 동해바다 명칭이 일제시대 이전에는 `Mer de coree` 등 

`조선해`의 영문명칭으로 널리 알려지다가 일제시대 이후 

전세계의 대부분의 지도에선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한국해라고 항의하기는커녕 

맑고 푸른바다라는 뜻의 청해(淸海)로 표기하자고 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를 거절하고 있다. 

지도에 일본해에 떠있는 섬을 한국 영토라고 한다면 

전세계 누가 믿어주겠는가? 

* 맺음말 - 

독도는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암석덩어리가 아닌 피같은 영토다. 

한국의 영토임을 전세계에 널리 홍보하고 일본에게는 항의 정도가 아닌 강력한 경고를 해야 한다. 

이 상태로 몇년만 지나면 전세계에서 우리만 바보 되는 것이다. 

남의 땅을 버젓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꼴이 될테니 말이다.

"고이즈미 8.15에 야스쿠니 참배하라"

"반미는 노무현정권 국가전략" 

"위안부할머니는 북한공작원"

"러ㆍ일전쟁은 非백인 첫 승리"

(도쿄=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왜곡을 주도한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지난 10일 개최한 후쇼샤(扶桑社)판 교과서 채택 심포지엄은 망언의 '경연장'이었다.

"위안부할머니는 북한공작원"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부터 "고이즈미(小泉) 총리는 8월15일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라"는 선동에 이르기까지 우익 발제자들은 앞다퉈 망언을 쏟아냈다.

다음은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중앙본부'로부터 입수한 발언 청취록.

▲이자와 모토히꼬(井澤元彦ㆍ작가) = 반일(反日) 보도를 하는 언론과 반일이 목적인 일본의 좌익보도기관이 문제다. 역사의 명장면인 러ㆍ일전쟁은 세계사에서 비(非)백인이 백인에 승리한 전쟁이다. '다케시마'(독도) 문제에 있어 한국은 공정하지 않다.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고 한반도침략의 제1보는 다케시마가 아니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ㆍ도쿄기독교대학 교수) = 한국의 현정권은 좌익정권이고 남북 민족화해 정책을 중시한다. 반미감정은 노무현 정권의 국가전략이다. 북 한의 독재정권으로서의 구체적 사례를 교과서에 기술해야 한다. '납치모임'이 후쇼샤 공민교과서를 채택하도록 지지하고 있다. 현재의 반일보도가 오히려 '새역모'에게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고 있다. 한국이 이상한 것은 역사교육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은 반한(反韓)사관 반일사관이다.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ㆍ산케이신문 워싱턴 주재 특별위원 겸 논설위원) = 중국의 교과서는 사실을 왜곡하고 엉터리이다. '난징대학살' '100인 참수' 등이 좋은 예이다. 중국의 교과서에 실린 것은 의심스러운 사진, 엉터리 사진 투성이다. 초등학생이 알아야하는 장(章)에는 일본인의 잔학성, 항일운동의 모습이 단지 나열돼있고 초등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은 10여장의 잔혹한 사진과 일본인의 잔학성을 과장한 것들이다. 베이징(北京) 반일시위는 당국이 허용해 선도하고 있다. 반일정책은 국시이고 일본을 때리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오락이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한국은 현재 자주국방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한ㆍ미동맹은 종말을 향하고 있다. 도쿄재판(전범재판)은 역사에 죄악감을 가져왔다. 대만인들은 일본의 통치가 정말 좋았다고 감사하고 있다. 대동아전쟁은 아시아제국에 긍정적인 면을 준 것이 사실이다. 전쟁중 일본군은 아시아에 있어 해방군으로서 맞아졌고 (아시아인들이) 일본병사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있다. 새역모 교과서는 100점 만점에 90점은 된다.

▲후지오카 노부카스(藤岡信勝ㆍ새역모 부회장) = 1982년 교과서를 통한 다른 나라의 일본 침략이 시작됐다. 당시 보수정당이 외국의 간섭을 허용했다. 마르크스 좌익세력을 가진 일본 정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외국을 이용해 자학적인 교과서를 추천해왔다. 현재의 중국, 한국에서 나타난 반일시위는 조장되면 조장될수록 일본에서는 오히려 역소용돌이가 증폭돼 긍정적인 면을 가져온다.(후소샤 교과서 채택에 유리하게 된다)

한국은 반일이 아니다. 근본은 북한에 있다. 예를 들어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위안부시위는 북한의 공작원이 하고 있다. 또 올 6-7월에 걸쳐 새역모 교과서 채택저지를 위해 일본에 오는 한국인 세력을 뒤에서 이끄는 것은 북한 세력이고 요코다 메구미를 납치한 장본인들이다. 6일자 아사히(朝日)신문은 '위안부를 전 교과서 싣지않아'가 1면이었다. 위안부는 1990년대 날조된 것이고 1996년에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이 전 교과서에 실렸다. 그것이 2005년에는 전 교과서에서 사라진 것 뿐이다. 현행 교과서는 한국제 교과서이다. 후소샤만 다르다. 

▲야기 슈지(八木秀次ㆍ다카사키경제대학 조교수) = 후소샤가 역사문제와 납치문제를 취급하기 시작한 결과 국가주권과 영토문제에 초점이 됐다. 현행 교과서는 국익을 생각하지 않고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르치지않아 국가에의 귀속의식을 빼앗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반일시위는 일본 국내의 반일문제가 발단이다. 후소샤를 비판 하는 아사히신문은 규형을 잃었다. 어느 나라 신문인가. 아사히시문이야말로 가정과 직장에서 읽기에 부적절하다.

'다케미사'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일본영토인지 학습지도요령에 적혀있지 않다. 한국은 역사인식이 엉터리여서 그들의 주장하는 식민지정책과는 일체 관계없다. 원래 돗토리번이 갖고 있던 것이고 넘겨줄 근거는 없다.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지않는 것은 불법점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에 있어 불리하기 때문이다. 근현대사에 있어 근린제국조항이 설치돼 지금 역사교과서는 어느나라 교과서인지 모르게됐다. 반일의 상징 유관순을 실을 거라면 요코다 메구미를 싣는게 낫다. 1945년 8월의 한국 해방을 축하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아사히신문은 '쇼와(昭和)의 날' 제정을 복고주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쇼와천황은 전쟁책임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ㆍ다쿠쇼쿠대 교수) = 반일의 원흉은 중국이나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보도기관이다. 일그러진 일본의 원흉을 잘라버리면 해외의 반일은 소멸한다. 북한에 의연하게 경제제재를 실시하자. 중국의 내정간섭에 굴하지 말고 고이즈미(小泉)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반드시 8월15일에 하라. 


<日 '새역모' 심포지엄서 쏟아진 '망언'들>

"고이즈미 8.15에 야스쿠니 참배하라"

"반미는 노무현정권 국가전략" 

"위안부할머니는 북한공작원"

"러ㆍ일전쟁은 非백인 첫 승리"

(도쿄=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왜곡을 주도한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지난 10일 개최한 후쇼샤(扶桑社)판 교과서 채택 심포지엄은 망언의 '경연장'이었다.

"위안부할머니는 북한공작원"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부터 "고이즈미(小泉) 총리는 8월15일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라"는 선동에 이르기까지 우익 발제자들은 앞다퉈 망언을 쏟아냈다.

다음은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중앙본부'로부터 입수한 발언 청취록.

▲이자와 모토히꼬(井澤元彦ㆍ작가) = 반일(反日) 보도를 하는 언론과 반일이 목적인 일본의 좌익보도기관이 문제다. 역사의 명장면인 러ㆍ일전쟁은 세계사에서 비(非)백인이 백인에 승리한 전쟁이다. '다케시마'(독도) 문제에 있어 한국은 공정하지 않다.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고 한반도침략의 제1보는 다케시마가 아니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ㆍ도쿄기독교대학 교수) = 한국의 현정권은 좌익정권이고 남북 민족화해 정책을 중시한다. 반미감정은 노무현 정권의 국가전략이다. 북 한의 독재정권으로서의 구체적 사례를 교과서에 기술해야 한다. '납치모임'이 후쇼샤 공민교과서를 채택하도록 지지하고 있다. 현재의 반일보도가 오히려 '새역모'에게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고 있다. 한국이 이상한 것은 역사교육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은 반한(反韓)사관 반일사관이다.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ㆍ산케이신문 워싱턴 주재 특별위원 겸 논설위원) = 중국의 교과서는 사실을 왜곡하고 엉터리이다. '난징대학살' '100인 참수' 등이 좋은 예이다. 중국의 교과서에 실린 것은 의심스러운 사진, 엉터리 사진 투성이다. 초등학생이 알아야하는 장(章)에는 일본인의 잔학성, 항일운동의 모습이 단지 나열돼있고 초등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은 10여장의 잔혹한 사진과 일본인의 잔학성을 과장한 것들이다. 베이징(北京) 반일시위는 당국이 허용해 선도하고 있다. 반일정책은 국시이고 일본을 때리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오락이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한국은 현재 자주국방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한ㆍ미동맹은 종말을 향하고 있다. 도쿄재판(전범재판)은 역사에 죄악감을 가져왔다. 대만인들은 일본의 통치가 정말 좋았다고 감사하고 있다. 대동아전쟁은 아시아제국에 긍정적인 면을 준 것이 사실이다. 전쟁중 일본군은 아시아에 있어 해방군으로서 맞아졌고 (아시아인들이) 일본병사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있다. 새역모 교과서는 100점 만점에 90점은 된다.

▲후지오카 노부카스(藤岡信勝ㆍ새역모 부회장) = 1982년 교과서를 통한 다른 나라의 일본 침략이 시작됐다. 당시 보수정당이 외국의 간섭을 허용했다. 마르크스 좌익세력을 가진 일본 정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외국을 이용해 자학적인 교과서를 추천해왔다. 현재의 중국, 한국에서 나타난 반일시위는 조장되면 조장될수록 일본에서는 오히려 역소용돌이가 증폭돼 긍정적인 면을 가져온다.(후소샤 교과서 채택에 유리하게 된다)

한국은 반일이 아니다. 근본은 북한에 있다. 예를 들어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위안부시위는 북한의 공작원이 하고 있다. 또 올 6-7월에 걸쳐 새역모 교과서 채택저지를 위해 일본에 오는 한국인 세력을 뒤에서 이끄는 것은 북한 세력이고 요코다 메구미를 납치한 장본인들이다. 6일자 아사히(朝日)신문은 '위안부를 전 교과서 싣지않아'가 1면이었다. 위안부는 1990년대 날조된 것이고 1996년에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이 전 교과서에 실렸다. 그것이 2005년에는 전 교과서에서 사라진 것 뿐이다. 현행 교과서는 한국제 교과서이다. 후소샤만 다르다. 

▲야기 슈지(八木秀次ㆍ다카사키경제대학 조교수) = 후소샤가 역사문제와 납치문제를 취급하기 시작한 결과 국가주권과 영토문제에 초점이 됐다. 현행 교과서는 국익을 생각하지 않고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르치지않아 국가에의 귀속의식을 빼앗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반일시위는 일본 국내의 반일문제가 발단이다. 후소샤를 비판 하는 아사히신문은 규형을 잃었다. 어느 나라 신문인가. 아사히시문이야말로 가정과 직장에서 읽기에 부적절하다.

'다케미사'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일본영토인지 학습지도요령에 적혀있지 않다. 한국은 역사인식이 엉터리여서 그들의 주장하는 식민지정책과는 일체 관계없다. 원래 돗토리번이 갖고 있던 것이고 넘겨줄 근거는 없다.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지않는 것은 불법점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에 있어 불리하기 때문이다. 근현대사에 있어 근린제국조항이 설치돼 지금 역사교과서는 어느나라 교과서인지 모르게됐다. 반일의 상징 유관순을 실을 거라면 요코다 메구미를 싣는게 낫다. 1945년 8월의 한국 해방을 축하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아사히신문은 '쇼와(昭和)의 날' 제정을 복고주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쇼와천황은 전쟁책임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ㆍ다쿠쇼쿠대 교수) = 반일의 원흉은 중국이나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보도기관이다. 일그러진 일본의 원흉을 잘라버리면 해외의 반일은 소멸한다. 북한에 의연하게 경제제재를 실시하자. 중국의 내정간섭에 굴하지 말고 고이즈미(小泉)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반드시 8월15일에 하라.

우산도(于山島)·자산도(子山島)·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 


현재의 독도(獨島)는 예로부터 우산도(于山島)·자산도(子山島)·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 등으로 불려왔으며, 일본에서는 송도(松島)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명칭인 [독도](獨島)로 처음 쓰인 것은, 1906년(광무10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의 [울릉군수보고서]에서 [本郡所屬獨島]라는 기록과 한말 지사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서였다. 그 이전에는 주로 [우산도](于山島)나 [삼봉도](三峰島)로 불렸다.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울릉도편 권58]과 [세종실록지리지 권153]에 독도와 울릉도를 [于山·武陵]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독도와 울릉도를 [于山鬱陵]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숙종실록 권30]에 동해 어민 안용복이 울릉도에 들어가 자칭 송도(松島)에 산다는 倭人을 보고, [松島는 子山島로서 또한 우리 나라의 땅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자산도](子山島)는 우산도(于山島)의 誤記인 듯 [증보문헌비고]에는 [우산도](芋山島)로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독도임에 틀림이 없다. 

[삼봉도](三峰島)라는 명칭은 [성종실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독도 동남방에 촛대와 같이 뾰족하게 솟은 바위섬이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세 봉(峰)으로 성립된 것 같아서, 成宗朝에 이 섬을 삼봉도(三峰島)라 한 것 같다. 

[가지도](可支島)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며, 주변에 물개과에 속하는 바다 짐승인 可支魚(강치)가 서식하는 데에서 유래하여 1791년(정조18)경에 사용된 것 같다. 

오늘날 사용되는 [독도](獨島)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 섬이 동해 한복판에 외로이 있기 때문에 독도(獨島)라 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섬 자체가 바위, 즉 돌로 성립되어 있고, 경상도 방언에 돌을 독이라 하므로 [돌섬]이라는 뜻에서 [독도]라고 불렀다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과는 다르게 世界海圖上에는, 1849년(헌종15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쿨]호가 독도를 보고 붙인 [리앙쿨]암(Liancourt Rock)이라는 명칭과, 1855년(철종6년) 영국함선 [호네트]호가 붙인 [호네트]암(Hornet), 그리고 日本名인 죽도(竹島; Dakeshima)로 표기되고 있다.

참조 : http://tokdo.kordi.re.kr/

 

가. 우산도(于山島)

세종실록(1417년)지리지(地理志) 울진현조(蔚珍縣條)에 의한 기록에 의하면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이 현 바로 동쪽바다 가운데......’ 여기에서 우산은 독도를 무릉은 울릉도를 가리킨다. 우산은 문헌에 따라 여러 표기【자산(子山), 간산(干山), 천산(千山)】가 있으나 우산의 잘못된 표기로 보여진다. 

우산과 무릉의 위치나 거리에 관한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후자의 주(注)가운데 ‘일설에 의하면 우산과 울릉은 본시 같은 섬이다 ’라는 기록이 있어 일본측에서는 일도설(一島說;우산과 울릉을 두 개의 섬이 아니라, 하나의 섬이다)에 따라 일본이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즉 울릉도와 우산도가 합하여 우산국을 형성했으나, 우산국이 멸망하자 자연 우산도라는 도명(島名)으로 바뀌어 울릉도가 우산도라고 병칭되다가 우산도라는 명칭은 따로 분리되어 주로 독도를 지칭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된다고 한다. 

나. 삼봉도(三峰島)

조선 초기 우산도 외에 삼봉도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종때 많은 동해안 어민들이 세금과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간 곳인데, 당시 영안도(함경도)관찰사 이극명이 파견한 김자주등이 경성 옹구미포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떨어진 삼봉도에 겁이 나서 상륙하지 못하고 그림만 그려왔는데 그 그림이 현재의 독도와 같다고 한다. 

다. 가지도(可支島)

정종실록(1794년) 무오조(戊午條)에 독도를 가지도라 부른 이유가 독도에 해려(강치)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데 당시 해려를 가제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이것을 한자로 하여 가지(可支)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라. 독도(獨島)

처음 공식 사용된 것은 광무 10년(1906년) 음력 3월 5일자 울릉도 군수 심홍택의 보고서에서 심홍택은 당시 일본 오키섬 도사 동문포 일행이 이 섬을 일본에 편입하였다는 사실을 통고하여 왔다는 보고서 가운데 ‘본군소속 독도’(本郡所屬獨島)라고 하였다.

내용출처 : http://contents.edu-i.org/gongmo/2001/ds22eqo/d-2.html

※독도가 우리땅인 이유(역사)

독도의 내력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본토 유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512) 후였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512)년에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 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 1432년 (세종 14)에 편찬된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동해 상에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531년 (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을 담은 <장한상 울릉도사적기>를 펴냈다. 

이것은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 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하는 것이다. 18세기 에 나온 정상익의 <동국지도>에 이르러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가 정확하게 표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지도첩에는 으레 울릉도 옆에 우산도 또는 자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본 스스로도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자료가 줄을 잇는다. 

독도는 512년 울릉도와 함께 신라에 귀복되었으며, 고려에서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살게 하는 등 울릉도와 독도 경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등으로 불렀다.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정책을 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가 잦아지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 받고 일본 어부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1667년 일본인이 편찬한 <은주시현합기>, 1869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편찬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876년 일본 내무성에서 만든 <태정宮> 결정서, 1876년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朝鮮東海 岸圖>, 1905년 동경박물관에서 펴낸 <일본전쟁실기>, 1936년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나온 <지도구역일람도> 등의 자료 등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혔다.

기인 1899년(광무 3년)에 당시 중등과정 신식교육기관에서 활용됐던 <대한지지> 제 1권에 삽입 돼 있는 지도 대한전도에는 울릉도 옆에 '于山'이라는 표기와 함께 섬이 그려져 있으며 좌 측 상단에는 '光武 3년 12월 15일 學部 편집국 刊'이라는 표시가 선명히 적혀져 있다.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5년 앞선 것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실을 뒤엎을 수 있는 귀중한 발견으로 평가된다.'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 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하였다.

※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는 이유

일본의 입장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28일. 그로부터 4주 뒤인 2월22일 시마네 현(縣)은 현(縣) 고시40호로 우리의 독도를 「다케시마 」죽도(竹島)로 명명,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둔다고 공시했다. 그후 독도는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규정하는 해양 경계선은 한˙일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평화선(Peace Line)'을 규정하였고, 그 뒤 51∼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협상과정에서 두 나라간의 외교문제로 논쟁대상이 되었으나 그 해결이 뒤로 미뤄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 선거공약과 정책지침에까지 공공연히 독도 영유권주장을 포함시키는 등 독도문제를 수면 하의 영토문제」에서 「수면 위의 영토분쟁」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일본이 독도 영토편입을 주장하는 근거는 첫번째로, 근세초기 이래 독도는 일본영토였고 영토편입 직전까지 오랫동안 일본이 「실효적 경영」을 했으며 두 번째로, 영토편입 당시 독도는 주인 없는 돌 섬이었으므로 「무주물선점(無主物先占)」을 한 것이라는 두 가지 논리로 집약될 수 있다. 

또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대일평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에 실려있는 제2조 (a)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그리고 울릉도를 포함하는 "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 권원(title)과 청구권(claim)을 포기한다."의 세 섬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우리 나라와 일본은 큰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는 이 세 섬의 한국의 영토에 포함되는 중요한 섬의 예로서 언급된 것이며, 따라서 울릉도에 딸린 섬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일본은 이 세 섬은 한국 영토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외곽선을 표시하는 섬들이며, 따라서 독도는 한국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무성 관료 출신의 관변학자 가와카미 겐조(川上 健三)를 중심으로 다수파를 이루고 있는「고유영토=실효. 메이지(明治)시대에 와서도 오키 도민(島民)들은 울릉도로 가는 길에 죽도(竹島)에서 전복 등 해산물채취에 종사했다. 1898년께 부터는 오로지 강치(물개 비슷한 바다동물)잡이에 전념하게 됐다.

그러자 「강치적 경영론」은 1966년 가와카미가 펴낸 「다케시마(竹島)의 역사지리학적 연구」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저자가 외무성조사관이었을 때 쓴 이 책은 일본측이 독도영유권을 정당화하는데 인용되는 가장 유력한 문건이다. 독도의 실효적 경영에 관한 가와카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죽도(竹島)의 개발럭嚥동 관해서는 1618년에 오타니(大谷)레ザ粲タ(村川) 양인이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로 가는 도항권을 얻어 이 섬의 개발에 종사했고 울릉도를 오가는 길에 지금의 竹島에 들러 어획을 했다. 이에 관한 고문서는 많다. 또한 이 섬의 경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1696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확한 지도」도 있다. 


강치잡이에 나서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나 강치가 절멸위기에 처하게 됐기 때문에 1904년 9월 나카이(中井 養三郞)가 독도의 영토편입렝鍛釉 요청하게 됐다』「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제9권「죽도(竹島)」항; 길천홍문관(吉川弘文館) 1988년간) 이는 그 자신이 집필한 독도연구서의 핵심적 내용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일본측은 울릉도가 조선조의「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4백50년 동안 무인화해 있는 사이에 오타니(大谷)등이 울릉도를 「발견」, 그곳에서 벌목에 종사하면서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한 것을 중시한다. 가와카미와 같은 「실효적 경영론자」들은 수 백년 동안 비어있던 울릉도로 본토의 한국인들이 직접 나가서 개발에 손을 댄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더 멀리 떨어진 독도로 나가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는 주장이다. 

이상이 일본측 독도영유권주장의 주요핵심이다. 이를 철저하게 논박하고 제압하기 위해서는 현재 확보하고 있는 우리측의 자료와 사료를 한층 더 보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토문제는 가장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측에서 제기될 때 감정폭발이 먼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감정을 진정시키면서 일본을 침묵케 하는 길을 찾는 것은 미래지향적 한렝構喚甕 위해 한국인이 발휘해야할 지혜다. 


우리의 입장

정부는 독도문제에 관해 「무대응」이 최선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현재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큼 일본측의 「시비」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측 입장의 근거는 아래와 같다

지정학적 근거

우리 영토인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48해리인데, 일본 은기도에서는 이 거리의 약 2배인 82해리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우리 나라에 포함되어야 한다

역사적 근거

1. 독도는 신라시대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을 형성하였으며,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신라에 귀순하여 왔다. 그 이후 계속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의 관리하에 있다.

2. 일본이 1905년 도근현시 40호 행정초지를 취한것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님을 실증하는 것이다.

국제법상 근거 

1. 그 지역의 주인이 없어야 한다.

2.영역취득의 국가의사가 있고, 그 의사를 대외적으로 공표 하여야 한다.

3.실효적인 점유가 있어야 한다

카이로 선언

포츠담선언 '카이로선언'을 보면 폭력과강요에 의해 취득한 모든 영토를 돌려준다는 구절이 있으며,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카이로선언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선언하였으므로, 폭력과 강요에 의해 빼앗겼던 독도를 일본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대표적 예가 '고종강제퇴위'사건이다. 일본은 1905년 그들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이에 대항하여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회복을 위해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한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궁궐밖에 대포를 배치한 채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켰다

국제사회 상황에 따른 우리의 입장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올 경우 우리도 같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맞대응 하면 국제적으로 독도가 분쟁 수역이라는 인식을 심으려고 하는 일본측의 의도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 따라서 소리나지 않게 독도에 대한 실질적 점유를 강화함으로써 일본이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독도에 접안시설 공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탈환」하기 위해 당분간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는 한·일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제제기는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기록용」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의 「무대응」 전략에도 한계는 있다. 94년 발효된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전세계가 바다의 경계선을 긋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한·일양국도 그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 : Exlusive Economic Zone)은 그 수역의 주인이 되는 연안국이 그 수역 안에서 돈벌이가 될 만한 모든 경제적인 활동을 배타적(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수역을 가리킨다. 

이 수역은 영해와 공해의 중간에 자리잡는 '제3의 수역' 이다. 이 수역의 성격은 경제 활동 면에서는 영해와 같고, 선박이나 비행기의 통과와 국제 통신 등에 있어서는 공해와 같다. 이 수역의 주인이 되는 연안국이 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생물, 비생물 자원의 탐사와 개발 및 보존과 관리

◎수력, 조력, 풍력 발전을 비롯한 경제적 탐사와 개발

◎인공섬 시설 및 구조물을 설치 운영 하는 권리 

◎해양 환경의 보호 보존에 대한 관할권

◎해양에 대한 과학적 조사권

이상과 같은 특성 때문에 이 수역을 '자원 영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수역에서 다른 나라들의 모든 권리가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 수역에서 선박 항해 및 비행기상공 비행의 자유와 해저 전선 파이프라인 부설 등의 자유를 지닌다.

앞으로의 협상추이에 따라서는 독도문제가 국제해양법재판소등의 심판대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정부가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일본과의 영유권 다툼은 피할 수 없게 된다.정부는 이런 상황이 오더라도일본측의 논리를 제압할 수 있는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각종 역사적 자료와 지도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참고자료

울릉도에서 뱃길로 3시간 여 소요(군함이나 해경정일때 소요시간)되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라는 행정구역을 가진 독 도. 해발 98m의 동도와 해발 168m의 서도라는 두 개의 주요 섬과 주변의 가제바위, 지네바위, 구멍바위, 미륵바 위 등 각각의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36개의 암초로 구성된 독도. 250만년 이상 전에 울릉도, 제주도 보다 먼저 형성된 해저산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지질유적이라는 독도.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 정된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의 번식지 등 다양한 그들만의 아름다운 생태계가 형성된 독도

*도대체 가로세로 400m의 이 조그마한 땅덩이에 무엇이 있길래, 한국과 일본은 이리도 오랜 세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영유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 독도의 일반적인 경제적 가치. 

독도주변 해역은 황금어장이다.독도주변해역이 풍성한 황금어장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북한한류와 남쪽 에서 북상하는 대마난류계의 흐름들이 교차하는 해역인 독도주변해역은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회유성 어족이 풍부 하기 때문에 좋은 어장을 형성한다. 

어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는 회유성 어족인 연어, 송어, 대구를 비롯해 명태, 꽁치, 오징어, 상어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오징어잡이 철인 겨울이면 오징어 집어등의 맑은 불빛이 독도 주변 해역의 밤을 하얗게 밝히곤 한다. 또한 해저암초에는 다시마, 미역, 소라, 전복등의 해양동물과 해조류들이 풍성히 자라고 있어 어민들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며, 특히 1981년 서울대 식물학과 이인규 교수팀의 조사에 의하면, 독도의 해조식생이 남해안이나 제 주도와 다른 북반구의 아열대지역이나 지중해 식생형으로 볼 수 있기에, 별도의 독립생태계 지역으로 분할할 수 있을 정도로 특유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 독도의 군사적 가치 및 해양 과학적 가치

1905년 노일전쟁의 최후를 장식한 이른바 '동해의 대해전'에서 독도의 군사적 가치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한국령 독도를 일본령 '다케시마'로 개명하며 시마네현 은기도(隱岐島)의 소관으로 1905년 2월 15 일에 일본내무성의 결정으로 독도를 강제적으로 일본령으로 편입하였으며, 1905년 8월 19일에는 독도에 망루를 준 공하였<극비 명치삼십칠팔년 해전사>기에, 러시아 함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독도에 고성능 방공레이더 기지를 구축하여 전략적 기지로 관리하고 있으며, 이곳 관측소에서 러시아의 태평양함대와 일본 및 북한 해·공군의 이동상황을 손쉽게 파악하여 동북아 및 국가안보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경상북도에 의하면 1998년부터 2001년까지 72억원을 들여 독도 북서쪽 800m 해상에 50평 규모의 철골 구 조물인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대구매일신문.98년 12월 4일자) 이 독도 해양과학기지를 통해 독도주변해역의 해양상태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여 기상예보모델의 초기값 중 해양상태를 나타내는 값을 보다 정확하게 입력시킴으로서 보다 적중률 높은 기상예보가 가능함은 물론, 지구환경 연구, 해양산업활동 지원과 해양오염방지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실제 1993년 10월 북한 청진항 동쪽 300km 해상에서 러시아가 핵 폐기물을 투기한 행위가 환동해권 국가인 한 국 및 일본을 극도로 자극하였으며, 이후 동해 내에 투기된 오염물질의 이동, 확산, 분해, 해저 침적과정 등을 이 해하고 정확히 예측하는 과학적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동해의 해수 및 물질순환에 관한 연구 3차년도 최종보고 서. 과학기술처. 1997) 

㉰ 독도의 지질학적 가치 .. 독도는 세계적인 지질유적 

앞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독도의 생성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450만년 전부터 250만년전 사이인 신생대 3기의 플라이오세(Pliocene epoch)기간의 해저 화산 할동에 의해 형성되어졌으며, 이 시기는 울릉도(약 250만 전∼1만년 전)및 제주도(약 120만년 전∼1만년 전)의 생성시기 보다 앞선 시기이다. 생성시기로 따진다면 울릉도, 제주도의 형인 셈이다. 애국가의 표현대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은다면', 독도는 더 이상의 작은 바위섬이 아니고, 높이 2천여m의 거대한 산의 꼭대기라고 한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독도는 동해의 해저로부터 해저의 지각활동에 의해 불쑥 솟구친 용암이 오랜 세월동안 굳 어지면서 생긴 화산성 해산이다. 이러한 독도는 원래 동도,서도가 한덩리인 화산섬이었다. 몇십만년의 세월이 흐르며 바닷물에 의해 침식작용 과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을 거듭하며 원래 부드러운 성질의 돌이 천천이 깍여들어갔다.(파랑에 의한 해식작용) 이 러한 해식작용의 결과로 칼로 깍은듯 날카롭고 가파른 해식애(sea cliff)들이 만들어졌으며, 한편에서는 서도의 북 쪽과 서쪽 해안처럼 파식대지(wave-cut platform:파도에 깍여 만들어진 바닷가 해저의 평탄면) 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질구조를 갖는 독도는 지질학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고 있다. 독도는 해저 밑바닥에서 형성된 벼개용 암과 급격한 냉각으로 깨어진 부스러기인 파쇄각력암이 쌓여 올라오다가 해수면 근처에서 폭발적인 분출을 일으켜 물위로 솟다가 대기와 접촉할때 생기는 암석인 조면암, 안산암, 관입암 등으로 구성된 '암석학의 보고'라고 한다. 해저산이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문 예이며, 또한 오랜세월 동안 파식 및 침강작용에 의해 원래 의 모양을 간직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독도는 해저산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지질유적이라고 한다. 

일본이 독도에 관심을 갖는 진짜 이유 - 독도주변 해역에 천연 가스층이 존재한다. 1997년 12월 러시아과학원 소속 무기화학 연구소에서 연구중인 경상대 화학과의 백우현 교수는 연구소장 쿠즈 네초프(Kuznetsov)로부터 '한국의 동해바다 한 지점에 붉은 색으로 하이드레이트 분포 추정지역임을 분명히 표기 하고 있는 지도'를 선물로 받았다.(신동아, 98년 9월호)'하이드레이트'란 메탄이 주성분인 천연가스가 얼음처럼 고체화된 상태로서, 기존 천연가스의 매장량보다 수십배 많은데다가 그 자체가 훌륭한 에너지 자원이면서도 석유자원이 묻혀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시자원'이라고 한다. 

98년 5월 백우현 교수가 러시아를 재방문했을 때 '동해에 관련된 하이드레이트의 자세한 정보'를 부탁하자, 쿠즈 네초프 소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우리 연구소 규칙상 공개할 수 없는 자료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동해의 독도영유권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 다지요?』. 신동아는 이 부분의 이야기를 매우 충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이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들 땅이라고 우겨온 중요한 이유가 동해상의 풍부한 해양자원 확 보를 염두에 둔 전략이라는 항간의 소문이 근거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란다.

현재 하이드레이트의 개발수준은 그 매장량이 막대한데도 개발기술이 초보단계이므로 러시아 만을 제외하고 상 업적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일본은 하이드레이트층에 대한 매우 축척된 탐사자료를 통해 99년 11월에는 난카이 해구에서 시험생산체계에 돌입한다고 한다. 1997년 기준 우리의 원유소비량은 전세계6위이며, 원유 수입량은 세계 4위이며, 에너지의 해외 의존도는 97.8%라고 한다.(신동아 98년 9월호. 1997년 에너지 경제연구원) 이러한 이유로 정부는 1970년부터 30만㎢에 달하는 대륙붕에 7개의 광구를 설정하여 해저탐사를 벌여왔으며, 실제 89년과 93년에는 비록 경제성이 미흡했지만 동해중심해역에서 가스층이 발견되었으며, 최근 98년 7월 27일에 는 울산 남동쪽 50km 해상의 대륙붕에서 이전의 것과 비교 안되게 뛰어난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었다. 

실제 국내 대륙붕 및 인접 중국과 일본의 석유 발견지점을 지도를 보면, 동중국해에서 동북방향으로 울산남동 쪽을 거쳐 독도인근해역을 거쳐 일본 서부연안을 향해 유전지대가 펼쳐진다고 한다. 30만㎢의 광할한 대륙붕에서 단지 30개의 시추공만을 꽂았을 뿐이며(일본은 38만㎢의 대륙붕에서 175개의 시추 공을 꽂았다고 한다), 이중 12개는 외국계회사가 국내에 석유를 팔려면 의무적으로 한반도 대륙붕에서 석유를 탐 사해야 한다는 의무조항 때문에 그나마 형식적으로 시추공을 박았다고 한다.

금번 러시아 과학원의 연구소에서 제공한 동해의 '하이트레이트층' 의 분포추정 지도나 석유발견지도의 경향을 보았을 때 독도주변해역의 해양석유자원의 보유가능성은 매우 명확하다고 하며, 그 경제적인 가치 또한 매우 높다 고 한다독도주변해역의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정부는 분명 상기해야 할 것이며, 결코 독도주변해역의 경제적 가치와 무관하지 않을 일본정부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의미깊게 상기해야 할 필요성이 재기된다.


내용출처 : http://www.tokdo.co.kr/kor/index.htm, http://www.truthofdokdo.or.kr/kor/html/story_main.html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 본 독도 

( 이사부 장군의 독도기록보다 더욱더 빠른 기록)

-서론(序論)- 

현재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함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분노하고 일본인들을 증오하며 또한 독도에 관한 사랑으로 물결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소위 냄비근성이라 하는 

열기가 뜨거울땐 뜨겁다가도 식을땐 열혈같이 빨리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올해 2005년은 우리나라 역사가 시작된지 4338년 되는 해이고 , 

그리고 더불어 11월 17일은 을사늑약 100주년의 날이다 

현재 독도사랑지킴이의 부클럽장을 맡고있는 필자(筆者)는 중국(中國)의 역사에 

관심히 지대하게 많고 또한 한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클럽을 학술(學術)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촐한 토론문을 하나 써보고자 한다. 

- 본론(本論)- 

-중국(中國)의 사서(史書)는 독도를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찾아볼수 있는 독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생존했던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三國志)에서 

찾아볼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조조 , 유비 , 손권 등의 활약이 

돋보이는 삼국지(三國志)이다. 

-삼국지(三國志)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삼국지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나관중은 수호지 , 삼국지 등 많은 작품을 우리에게 남겼는데 

소설이 모두 그렇듯이 허구가 많은 것이 그 특징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국지(三國志)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아니라 진나라의 무제(武帝:사마염)가 재위할 때 치서어사를 지낸 

진수 라는 사람이 쓴 사서(史書:역사서)이다 

진수의 아버지는 촉나라의 대장 마속이 진창에서 장합에게 패배한후 

마속은 참수당하고 그 부관이었던 진수의 아버지가 머리를 깍이는 

형벌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태사공(사마천). 반고,범엽,등과 더불어 중국의 사학(史學)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다 

흔히 우리들은 이 삼국지(三國志)를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라고 한다 

-삼국지에 기록된 독도에 대한 기록은 ? - 

삼국지는 , 위서(魏書) , 촉서(蜀書) 오서(吳書)로 나뉘어져있으며 이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 바로 동이전 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흔히 위지동이전이라고 한다. 

이 기록에는 고구려, 부여 등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지리에 관하여 기록되어있다 

그렇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 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相婁>接. <相婁>喜乘船寇 ,<北沃沮>畏之, 夏月 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 凍, 船道不 <王 > 別遣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 

이 기록에 대하여 번역한 기록을 살펴보자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이에 이르러 부딧쳤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포로와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함을 즐기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안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이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에 기록되어있는 기록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면 위나라의 관구검이 구려 라는 곳을 공격한것과 구려라는 곳을 

공격해서 구려의 왕이 옥저로 달아났다는 것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구려는 어떤 나라인가 ? 

위의 기록에서 구려(句麗) 라고 표기된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이다. 

또한 구려 왕 궁이라고 표기된 것은 고구려의 왕 동천왕 이다. 

동천왕의 어릴때 이름은 교체 , 그후의 이름은 위궁(位宮) 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위나라의 대장 관구검이 쳐들어온 것은 아마도 

위나라의 대장 관구검이 고구려의 환도성을 공격했을 때를 뜻한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환도성은 동천왕의 아버지 산상왕(연우)이 쌓은 도읍지 였는데 관구검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므로 동천왕은 북옥저로 말머리를 돌려 도주하였다. 

위나라의 왕기라는 장수가 달아난 동천왕을 추격하여 북옥저에 이르렀는데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왕기가 늙은노인에게 말하였다. 

“ 이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 

왕기의 물음에 늙은 노인이 대답하였다 

“저희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습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또 그 사람이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고 합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고 합니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노인의 대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가 이글을 읽으실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읽기 편하게 수정했지만 

이 늙은 노인의 대답에 독도에 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다. 

일단 첫 번째로 옥저라는 나라는 현재의 동해에 걸쳐 번성했던 부속국가이다 

물론 고구려의 속국에 지나지는 않았지만 여러 문화로 우리에게 일찍이 

알려져있다. 

위나라의 장군 왕기가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늙은노인이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울릉도를 지칭하는 대답일 것이다. 

옥저가 동해부근이고 바다의 동쪽에 하나의 섬이 있다고 했으니 

울릉도 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이 기록은 중 이미 예전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동천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3세기 였으니 512년 하슬라군의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시기보다 300년은 빠른 기록이다 

이당시 중국(中國)은 삼국시대(三國時代)였고 우리나라 역시 삼국시대(三國時代)였다 

 

 

- 참고 자료 -


 

삼국지(三國志) 정사(正史) 위지동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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