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기자(箕子)의 40세손 준(準)이 난을 피하여 서아성(徐阿城:경기도 이천)에 옮겨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지명을 따서 성을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전한다.

신라의 개국공신으로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에 오른 서두나(徐豆羅)의 후손 서신일(徐坤逸)이 이천 서씨의 시조이다.

그후 달성(達城)·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대구(大丘) 등으로 나뉘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 부여 서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降)으로, 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당 고종으로부터 서씨 성을 받았다고 하며, 그 후손 서존(徐存)이 중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서씨의 대부분은 이천 서씨이고, 역사상 빼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대구 서씨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144,335가구에 611,2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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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龜巖書院)


구암서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전 연귀산 기슭)에 있는 서침ㆍ서거정ㆍ서해ㆍ서성을 4인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서씨는 이천서씨의 시조 서신일의 후손으로 짐작되고 있다. 서신일은 기자의 42세손인 기준(애왕)의 후손이 된다는데 고대 기씨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9세기 중엽 위만에게 쫓겨 지금의 이천땅 서아성에 자리잡은 것이 서씨의 시초라고 한다.


신라 때에 이르러 개국공신 아성대장군 서두라가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신라 말기에 아간 서신일이 있었고 고려 초기에 서목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왕건)가 남정할 때 태조를 받들어 대천이 한천을 잘 건너게 했다는 공로로 이천백의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천서씨는 모두 그 후손이며 달성·장성·연산·평당·남평·남양 등 7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모두 서신일이 후손이라고 한다.


달성 서씨의 시조 진(판도공)은 고려 때 봉입우 대부,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공이 있어 달성(대구의 고호)군에 봉해지고 달성 (신라때는 달구화성, 지금은 대구 달성 공원)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세거하게 되었으며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달성서씨로 통칭되는 대구서씨가 있는데 이 두 씨족은 관향이 같은 지역이라는 점으로 보아 같은 혈손으로 생각되나 확실한 고증 자료가 없어서 합보를 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대구서씨 시조 한은 고려 때 조봉대부 군기소윤(소윤공)을 지냈으며 오대의 세계가 실전되어 자세하지 않다. 7세 익진의 증손 서거정 등 많은 인물을 낸 명문으로 대구에 세거했기 때문에 본관을 대구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달성 서씨는 서울에 올라와 벼슬을 지낸 경파와 고향에 남아 고향을 지키며 벼슬과는 별반 인연이 없이 지내 온 집안인 향파가 있는데 경파는 서한의 6대손인 서익진 (고려-판전)을 향파는 서진(고려-판도판서)을 각각 시조로 하고 오늘날에도 대동보 마저 따로따로 만들고 있다. 서씨는 대종이 이천서씨이지만 명벌로 빼어난 집안은 6대에 걸쳐 삼정승에 삼대제학을 지낸 대구서씨 뿐이다.


경파는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높은 벼슬로 영달하게 되자 족보를 편찬하면서도 고향의 일족은 내버려둔 채 자기들끼리만 족보를 꾸몄다는 것이 향파측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세계상으로는 향파가 큰 집이 된다고 한다.


지금도 대구와 달성이 족보를 각각 달리하고 있다. 선조들이 명확한 고증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근거를 찾지 못해 숙종 28년에 향파를 편말에 부치고 경파만을 중심으로 임오보의 첫 간행을 보게 된 것이 갈라진 시초라고 보아진다. 서씨로 첫 영의정을 지낸 공숙공 서문중이 족보를 간행하면서 향파와 합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조 방목(과거에 급제한 사람명단) 등 각종 문헌은 관향을 모두 달성으로 쓰고 있다. 경파는 조선조에 명문대가로 흥성이 극에 달했고 향파는 지방 선비의 집안으로 세도의 많은 차이를 가져온 것이 갈라진 큰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한 듯하다.


대구서씨는 고려조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조선조에 들어 서거정이 크게 현달하여 가문의 세력을 떨쳤으며 선조·인조때의 서성이 5도관찰사 3조판서를 지내면서 가문의 기반을 구축하고 그의 네 아들을 비롯한 자손 중 삼대 정승에 삼대 대제학 3대 대학자가 계속 배출되기에 이르러 1백여 년에 걸쳐 가장 현달한 가문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현 대구 국교 서남쪽 언덕)기슭에 숭현사를 세워 서침을 봉향하였다.


대구부민이 서침을 숭현사에 봉향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서침은 달성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현 달성공원)에 살았는데 1424년(세종6)달성(서씨소거)이 천참가성이므로 성터로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달성서씨들에게 다음과 같은 양도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연신지(영선못:현재의 영선시장 자리)와 신지(현재의 서문시장)일대의 몽리토지에 대한 세금을 국가가 받는 대신 달성서씨들이 받을 것, 둘째: 남산역(전 남산 병원 일대)과 동산일대와 바꿀 것, 셋째: 후한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성서씨 주손 침은「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어찌 그 대가를 바라겠습니까」하고 사양하였다.


그의 뜻을 전해들은 세종은 매우 기특히 여기면서 달리 소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서침은 일가가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보다는 백성들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대구 지방에서 바치는 환곡리자를 한 섬에 5되씩 감해 주옵소서」라고 상소하였다. 세종은 그 소청을 윤허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환곡 이자를 한 섬당 1말 5되를 받았는데 대구 지방에 한해서는 당시 한 섬에 1말 5되씩 받던 환곡의 이자를 5되를 감하고 이자 1말씩만 받도록 하였다. 그 뒤 이 지방 백성들은 5백년 동안 그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이 서침의 은덕을 입은 대구부민들이 서침의 갸륵한 자선혁덕을 기르기 위해 1665년(현종 6년)에 귀암사로 창건하였으나 언제 서원으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1675년(숙종 원년) 음 3월29일 유림에서 서침을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다가 1717(숙종 43)에 현재의 동산동 귀암상에 이건 시공하여 이듬해 1718년(숙종 44)3월 6일에 완공하였다. 이때 서침과 소윤공 서한의 후손인 서거정을 합향하였고, 1741년(영조 17) 2월20일에 역시 서한의 후손인 서성과 1757년(영조 33) 8월 26일 영의정을 지낸 서해를 추향하였다. 이렇게 해서 서침·서거정·서해·서성 4인을 배향하게 된 것이다. 1709년 (정조 4) 강당을 수리하였으며 1795년에 숭현사를 중건하였다.


구암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3년 종중에서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46년에 대종회 결의로서 향사를 지내다가 1970년 중단되었다. 1974년 8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암서원 숭현사(龜巖書院 崇賢祠

)

지정 번호 : 문화재 자료 2호

소 유 자 : 사유(달성서씨대종회)

소 재 지 : 중구 동상동 229

지정년월일 : 1975년 2월 5일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連龜山

-현 대구초등학교 서남쪽 언덕)에 건립되었고, 숙종 44년(1718) 현재의 동산동으로 이건(移建

)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毁撤

)되었다. 그 후 1924년 유림에서 재건하고 1943년 중수하였으며, 1974년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암서원은 신명여고 운동장 우측 언덕 아래에 북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입구의 경앙문(景仰門

)을 들어서면 우측에 유허비각(遺墟碑閣

)이 있고 맞은 편에 강당이 있으며, 강당 우측에 사당이 있고 그 뒷편에 제수청이 있다. 숭현사(崇賢祠

)는 강당 바로 후방에 3m쯤 떨어져 있으며, 뒷면은 신명여고 언덕이 막아 섰고 3방(方

)은 기와얹은 죽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출입문은 전면담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대구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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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조선 철종조에 개진면 양전리의 전설이야기입니다.

조선 철종조에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 서은열(徐殷悅)이라는 농부가 살았는데 이 사람은 기질이 담대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였다.

어느날 이곳 뒷산 어은곡기슭 밭에서 혼자 김을 매고 있노라니 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살금살금 솔밭을 헤치고 나아가 소리 나는 쪽을 유심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흰 여우 한 마리가 인두골(人頭骨) 하나를 돌에다 열심히 갈아 제 머리에 써보고는 맞지 아니하니 헤헤하고 웃고 나서 다시 그와 같이 계속하는 것이었다. 

서씨는“아무래도 저 놈이 둔갑하여 사람들을 놀릴 것이다.”하고, 밭에 돌아와 김을 다시 메고 있었더니 아름다운 여자가 골짜기에서 걸어나와 서씨곁에 서는 것이었다.

서씨가 바라보니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인적이 드문 골짜기에서 단 둘이 대하고 보니 서씨의 마음이 진정하기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 여인이 서씨에게 교태를 부리며 사랑하며 동침하기를 요구하니, 서씨는 “저기 저 골짜기로 먼저 가시요, 그러면 내가 곧 뒤따르리라.”하고 앞장 서기를 원하니 이 여인은 기쁜 마음으로 앞장 서서 걸어갔다. 이때를 노린 서씨는 들고있던 호미로 그 여인의 뒷통수를 힘껏 쳤더니 여인은 흰 여우로 변하며 도망쳐 버렸다.

그 이튿날 서씨는 어제 김을 매든 그 밭으로 가는 도중 자기 선산을 바라보니 무덤에서 흙가루가 날아오는지라, 깜짝 놀라 달려가보니 어제 그흰 여우가 자기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고 있지 않은가. 서씨는 부근의 칡으로 줄을 만들어 한쪽 끝은 나무가지에 맨 후 무덤 주위를 발로 굴르니 여우가 놀라 고개를 내어밀고, 덮혀져 있는 올가미는 집어던지고 사방을 살피다 서씨를 보자 그만 달아나 버렸다.

그 이튿날 걱정이 된 서씨가 조상의 무덤을 찾아보니 못된 여우란 놈이 또 장난을 하고 있어 화가 나 집으로 돌아와서 바가지로 만든 두레박에 여우머리에 알맞도록 구멍을 뚫어 다시 무덤으로 돌아와 여우가 들어간 구멍 위에다 덮어 씌우고 발로 굴르니 깜짝 놀란 여우가 무덤에서 뛰어 올라 두레박을 뒤집어 쓰니, 앞이 보이지 않아 도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온 마을 사람이 여우를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나오니 보이지 않는 여우가 심지어 남의 안방까지 뛰어다녔다. 계속하여 마을 사람들이 추격하니 놀란 백여우는 벽에 부딪혀 두레박이 깨어지고, 앞이 훤히 터이자 산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후부터 이 백여우는 어른들의 무덤은 해치지 아니하고, 애장터(어린아이의 무덤)를 파헤쳐 사체를 산산히 찢어서 마을 주변을 더럽히니 밤이면 시체냄새가 나서 온마을 사람들이 집밖을 나가지 못하였다. 온마을 사람들이 서씨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불평이 대단하였다. 서씨는 모든 것이 여우의 소행이라 생각하고저 백여우를 어떻든지 잡을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서씨는 산림이 울창한 어은골을 밤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여우를 잡을 궁리만 하는데, 첫날밤은 깨소금떡을 만들어 유인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꽤가 많은 여우가 하나도 먹지 않다가 다음날 조금 맛을 보니 고소하기 짝이 없어 서씨가 가까이 가도 먹고 있었는데 정신이 없는 여우가 마침내 잡혀 죽고 말았다. 아무리 뛰어난 짐승이라 하지만 사람의 지혜앞에는 꼼짝도 못하였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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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개국공신으로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에 오른 서두나(徐豆羅)의 후손 서신일(徐坤逸)이 이천 서씨의 시조이다.


그후 달성(達城)·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대구(大丘) 등으로 나뉘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 부여 서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降)으로, 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당 고종으로부터 서씨 성을 받았다고 하며, 그 후손 서존(徐存)이 중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서씨의 대부분은 이천 서씨이고, 역사상 빼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대구 서씨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144,335가구에 611,2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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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서강(徐岡)

【생몰년】 ?∼1461(세조 7)

【본 관】 이천(利川) 서(徐)

【저서·작품】 《병요(兵要)》,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461(세조 7). 본관은 이천(利川)으로 고려(高麗)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의 후손이며, 서혼(徐混)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29년(1477)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문한직을 역임했다. 단종 즉위년(1452) 집현전 부교리, 경연 부 검토관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고, 다음해 수찬으로 《병요(兵要)》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4년 행 집현전 부교리로 《문종실록(文宗實錄)》 편찬에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한 뒤 우헌납 · 좌헌납을 역임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 뒤에는 집현전 응교로 원종 공신 일등에 책봉되었고, 지사간원사를 거쳐 세조 5년(1459) 예문관 직제학으로 이근(李覲)과 함께 왕명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를, 다음해에 김구(金鉤) · 최항(崔恒) 등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하였다. 1461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7월 왕이 충순당(忠順堂)에서 종친(宗親) · 재추(宰樞)를 불러 연회를 열었을 때, 왕의 숭불을 논변하여 불경죄로 장 40여 대를 맞고 후원(後苑)에 감금되었다가 교살당하였다. 1467년 신원되었으며 세조는 언사(言事)에 의한 사사(賜死)를 뉘우치고 그의 후손을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였다. 성종 1년(1470) 그의 장모인 참판 이정손(李廷孫)의 처 윤씨(尹氏)의 상언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海東榜目, 大東韻府群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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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제도(姓氏制度)는 원래 왕가(王家)에서만 사용하다가 차츰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퍼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왕족에 한하여 성씨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후 삼국시대(三國時代) 고구려의 주몽이 고씨(高氏), 백제의 온조가 부여씨(扶餘氏), 신라의 혁거세가 박씨(朴氏)를 성씨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씨의 기원은 단군시대(檀君時代) 예국(穢國) 군장(君長)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衆人邊)을 부쳐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위지 동사강목(魏志 東史綱目)의 기록에 따르면, 기자(箕子)의 40세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 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라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습니다. 서씨로서 이름을 떨친 이는 신라(新羅) 때의 개국공신 아성(阿城) 대장군(大將軍) 서두라(徐豆羅)가 있었습니다. 

서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 말기에 아간(阿干)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입니다. 서신일(徐神逸)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그의 처음 조상인 서두라(徐豆羅)는 아성(利川城의 이름) 대장군으로 있었고, 서신일(徐神逸) 대에 이르러 산촌(山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겨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므로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먹이를 주며 극진히 간호해 준 다음 다시 산으로 놓아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의 신령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그대의 집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대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대의 자손이 세세(世世)로 재상(宰相)을 지내리라"고 했습니다. 나이 80이 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그는 그날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요, 필의 아들이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입니다. 

서씨(徐氏)라는 성은 왕이 하사했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서씨사적정해(徐氏史蹟精解)에 따르면, 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 40살에 사슴의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날,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느껴 왕의 눈에 들어 만주에게 서씨(徐氏)의 성을 내리고 뒤를 보살펴 줌으로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천서씨(利川徐氏)는 모두 서신일의 후손이며, 달성(達成), 장성(長城), 연산(連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남양(南陽) 등 7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모두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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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徐)씨의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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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는 옛문헌에 165개의 본관이 있었으나, 10여개의 본관 이외에는 시조 및 유래를 알 수가 없다.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단군시대(檀君時代) 예국(穢國) 군장(君長)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 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니,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衆人邊)을 붙여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2) 또한 위지 동사강목(魏志 東史綱目)의 기록에 따르면,
기자의 40세(혹은42세)손이며 고대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 쫏겨 남쪽으로 옮겨 진(辰)의 북쪽 변방인 지금의 이천(利川)땅인 서아성(徐阿城)에
자리잡아 살게 되고, 이 지명을 따서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魏志 東史綱目]
아울러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3) 그리고 또다른 기록인 서씨사적정해(徐氏史蹟精解)에 의하면, 왕이 하사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기씨조선왕족 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40살 되던 어느날 사슴의 목숨을 구해주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만주에게 서씨(徐氏) 성을 하사하고 뒤를 보살펴 주고,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고 한다.[徐氏史蹟精解]
신라 말기에 아간(阿干)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은 서씨의 도시조(都始祖)이자 이천서씨의 시조이며,
그에 따라 전해지는 서신일과 사슴설화는 이천서씨편에 소개하였다.
그후 이천서씨에서 달성(達成), 장성(長城), 연산(連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남양(南陽) 등 7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이들 중 달성서씨에서 다시 대구서씨등으로 나뉘었다고 전해지나
모두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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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씨 각 본관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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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 경북 경주 광성 군위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평
단양 달성 달천 담양 당성 대구 대전 밀양 복흥(순창) 봉성(평당)
부여 서산 서원 서천 석강 수원 안동 안성 여주 연산
연천 염주(연안) 영성 예천 용궁 울산 원주 의두 의령 의성
이천 인천 장성 전주 진주 창녕 천천 청주 충주 평당(봉성)
평택 함양 함평 해주 황산(연산) 등..
서기1985년 인구조사 당시 총 55개의 본관과 남한에 611,1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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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서씨 (南陽徐氏)
[유래]
시조 는 서 간 으로 알려지며,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과 화성군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지명으로,
고구려때의 당성군을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으로 개칭하였다가 1310년에 남양부가 되었다.
남양서씨(南陽徐氏)의 시조 [간]은 중국에서 귀화해온 8학사의 한사람으로
당성에 정착, 세거하면서 벼슬이 태사에 이르러 남양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 후(厚)가 고려 현종때 대장군으로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당성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간]을 시조로 받들고 남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4세손 눌(訥)이 문하시랑평장사를, 그의 아들 존(存)은 병부상서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으며,
정당문학을 지낸 찬(贊)의 아들 희팔(希八)과 판도판서에 오른 적(迪)의 부자가 유명했다.
한편 우승지 숙(淑)의 맏아들 충수(忠守)는 도승지을 역임했으며,
부위 혼(混)의 아들 충필(忠弼)이 부호군에 올라 호조참판을 지낸 아우 충우(忠佑)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양 서씨(南陽徐氏)는
남한에 총 2,940가구, 13,6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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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서씨(南平徐氏)
[유래]
남평서씨(南平徐氏)는 이천서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서신일(徐神逸)의 후손 서호(徐灝)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호[灝]는 누대로 남평에 세거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그의 아들 효당(孝堂)이,
조선조에 전생서 판관을 역임하고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손자 우(祐)와 지(祉)가 크게
현달하여 세거지인 남평을 본관으로 삼아 이천서씨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남평(南平)은 전라남도 나주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미동부리현을
통일신라때 경덕왕이 현웅현으로 고쳤고 고려조에서는 남평 또는 영평이라 하여
나주목에 속했었다. 그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1913년 나주군에 합해져서 지금의 남평면이 되었다.
서호의 손자인 현감 우(祐)의 아우 지(祉)는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조선10대 왕인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냈고 중종반정때에 공을세워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폐위된 단경왕후(중종의 비)의 복위문제로 대사간으로 있던 이행과의 의견 충돌로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외 참봉 연(演)의 아들로 현감을 지낸 탁(晫)과 전적을 역임한 국정(國楨)의 부자가 남평서씨(南平徐氏)를 빛냈다.
[인구]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102가구,5,298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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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達城徐氏)
[유래]
달성(達城)은 경상북도 남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달구화 또는 달구벌이라 불렀고,
서기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조에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으로 개칭하였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이천서씨(利川徐氏)에서 분관(分貫)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내력을 명확하게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천서씨 문헌에 서희(徐熙)의 아들 4형제 중 서주행(徐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달성서씨 시조 서진(徐晋)의 벼슬에 따른 이주 및 그의 정착에 따른
자연적 분관 또는 본관 생성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아뭏든 이천서씨에서 분관 되었다고 전해지는 달성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 향파(鄕派)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두 파는 조선 숙종(肅宗) 28년 서기 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두 파의 의견충돌이 있어, 결국 영조(英祖)대에 이르러 서기 1736년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大丘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달성서씨 계보는 서진(徐晋)의 향파에 그 본(本)을 둔다.
달성서씨의 시조 서진(徐晋)의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되며,
부인은 초계 주(周)씨였다.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기준(奇俊)과 손자 영(穎)에 이르기까지 3대가 모두 특출하여 연이어 달성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달성에 세거하여 대대로 살게 되었으며,
관향(본관)을 달성(達城)으로 하였다.
그후 후대로 내려와 당파 갈라지기가 성행하던 때에 9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이어왔다.
현감공파(縣監公派 : 濟) 학유공파(學諭公派 : 渡) 판서 공파(判書公派 : 涉) 
감찰공파(監察公派 : 近中)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蓮) 생원공파(生員公派 : 錫蓂)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笭) 참판공파(參判公派 : 宗一)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 震)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 균형(鈞衡)이 공민왕때에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방탕한 횡포를 탄핵하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그의 아들 [침]은 조선이 개국한 후 조봉대부로 전의소감을 지냈다.
침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문한(文翰)은 현감을 지냈으며, 차남 문간(文幹)역시 현감을 역임했고,
막내 문덕(文德)은 숙부인 송화 부사 [습]에게 출계하여 이조정랑과 만경 현감을 지냈다.
대사간 충(衷)의 증손 한정(翰廷)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영주 이산면 한성동으로 내려가 은거하다가
소백산 밑 순흥으로 옮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연구에 진력하며 스스로 호(號)을 돈암(遯庵)이라 불렀다.
한말에 와서는 서화에 탁월하여 [팔능]으로 일컬어졌던 병오(丙五)와
독립운동가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상일(相日)이, 영친왕 결혼식전에 참석했던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 등의 살해를 기도하다 피체되었던 상한(相漢)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외 여러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문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달성서씨 유허비는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달성공원의 주소는 대구시 중구 달성동 294번지이다.
[인구] 서기1985년 남한에 398,3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항렬표]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열(烈) 규(圭) 진(鎭) 수(洙) 상(相) 교(敎) 보(輔) 덕(德) (水)변 (木)변 (火)변
(火)변 곤(坤) 석(錫) 영(泳) 동(東) 병(丙) 정(廷) (金)변
규(奎) 현(鉉) 윤(潤) 춘(春) 병(炳) 규(圭)
(土)변 (金)변 (水)변 정(正) 환(煥) (土)변
(木)변 (火)변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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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서씨(唐城徐氏)
[유래]
당성(唐城)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의 옛지명으로 고구려때 이름이 당성군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당은군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초에 다시 당성군이라 하였다가
조선말기에 남양군이 되었고 그후 여러차례 변화를 거쳐 화성군에 속한 남양면이 되었다.
당성서씨(唐城徐氏)는 남양서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고려때 귀화해온 남양군[서간]의
12세손 원길(元吉)의 둘째 아들 득부(得富:남양서씨 시조의13세손)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당성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으며, 후손들이 남양 서씨에서 본관을 나누어 당성(남양의 옛 지명)으로 하였다.
조선 11대 왕인 중종때 특출하여 [송도삼절(松都三節)]로 불리워진 화담 경덕(敬德)은 시조 득부(得富)의 증손이며
호번(好蕃)의 아들로 형덕(馨德)·숭덕(崇德) 두 아우와 함께 기행(奇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고,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개성의 동문 밖 화담(花潭)에 초막을 지어 진리의탐구에 전심,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기(氣)와 이(理)의 상관 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으로 분화(分化)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했다.
[인구] 남한에 총145가구, 76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1985년)
[항렬표] 18세 19세 20세 21세
정(挺) 한(漢) 몽(夢) 경(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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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大丘徐氏)
[유래]
대구(大邱)는 영남지방의 중앙부에 위치한 행정중심지로 본래 신라시대에 달구화현, 달구벌 또는
달불성으로 불리우다가 757년에 대구(大丘)로 개칭되고, 1419년 대구군으로 승격되었다.
대구(大丘)가 대구(大邱)로 개칭된것은 지금부터 약 190년 전의 일이다.
1750년 대구의 유생 이양채가 대성 공자의 휘(諱)가 구(丘)자라 하여
대구의 개칭을 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때부터 점차 대구(大邱)로 쓰이기 시작했다.
대구서씨(大丘徐氏)의 시조 [서한]은 누대에 걸쳐 대구에 정착세거해 온 사족의 후예로
고려때에 조봉대부 군기소윤을 역임하여, 후손들이 대구를 관향(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1702년에 간행된 [대구서씨세보]에 의하면 대구서씨는 이천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씨족통보]와 [동국만성보]등의 문헌에도 이천서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적고 있으나 계대를 고증할수 없다.
그 중 달성 서씨에서 분관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다.
대구서씨는 시조 소윤공(少尹公) 서한의 다음 대부터 5대가 실전되어, 2~6세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7세 익진(益進)이 판전객시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의(義)가
호조 전서를 지냈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낙향하였다.
일찍이 영남내륙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문장과 도덕을 겸비한 세도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온
대구서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명문의 반열에 올랐다.
대구서씨의 인맥으로는 뛰어난 학덕문장과 예지로 조선초기의 법치덕화에 기여한
사가정(四佳亭) 거정(居正)과 약봉(藥峯) [성]을 들 수 있다.
달천부원군 미성(彌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거정은 세종과 성종대에걸쳐 45년간 벼슬길에
있으면서 육조의 판서를 거쳐 두번이나 대사간에 올랐으며, 특히 그는 문장과 글씨를 비롯하여
성리학은 물론 한문학과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신라 때부터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시문(詩文)의 정수만을 골라 실은 [동문선(東文選)]과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국통감(東國痛鑑)],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太平閑話)], [사가집(四佳集)], [오행총괄(五行摠括)]등
수많은 편저서를 남겨 오늘날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선조때 별시문과에 급제했던 약봉(藥峯) [성]은 5도의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거쳐
인조때 판중추부사에 올랐으며, 그의 후손에서 3대 상신(相臣:宗泰, 命均, 志修)과
3대 대제학(大提學:有臣, 榮輔, 箕淳), 3대 문장(文章:命膺,浩修, 有)이 배출되어
대구서씨의 가장 거대한 인맥을 이루었다.
조선 3대 현모(賢母)로 손꼽히는 약봉(藥峯)의 어머니 고성이씨는 시골에 살다가
일찍 과부가 되자 아들의 교육을 위해 한양에 올라와 지금의 만리동 약현에 살면서 자식을
훌륭하게 성장시켰으나 만년에 눈까지 멀었다.
[성]의 다섯 아들중 장남 경우(景雨)는 인조조에 우의정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원리(元履)가 한성부우윤과 호조참판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손자 문중(文重)은 숙종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성의 둘째 아들 경수(景需)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상리(祥履)가 병조참의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며, 현손 종제(宗悌)는 딸이 영조의 비(정성왕후)가 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종제의 현손 용보(龍輔)는 순조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후에
영중추 부사에 이르러 가세를 더욱 일으켰다.
성의 네째 아들 경주의 집안에서는 경주의 증손 종태(宗泰)가 좌, 우, 영의정을 모두 역임했고
그의 아들 명균(命均)은 우, 좌의정을 지냈으며, 아들 지수(志修)가 영의정에 올라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지수의 아들 유신(有臣)은 형,호,예조의 참판을 지내고 한성부 좌우윤을 거쳐 양관대제학에 올랐다.
그의 아들이 순조조 [죽석문집(竹石文集)]을 남긴 대제학 영보(榮輔)이며,
손자는 헌종과 철종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내며 청백리로 유명했던 기순(箕淳)으로
한집안에서 6대에 걸쳐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대구서씨의 골격을 이루었다.
한편 대사간 문유(文裕)의 손자 명응(命膺), 증손 호수(浩修), 현손 [유구]가 3대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학문의 전통을 세웠다. 북학파(北學波)의 비조로 일컬어진 명응(命膺)은
역학(易學),실학(實學)을 깊이 연구하여 명망이 높았고 역대 국악의 악보(樂譜)를 집대성한
[대악전·후보(大樂前·後譜)]를 간행하였으며, 그의 아들 호수(浩修)는 기행문집인 [연행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백과전서인 [임원경제십육지]를 저술한 유구는 농정에 관한
경론 및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 개혁을 누차 역설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유예지]를 저술하여
오늘날 국악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영상(領相)의 벼슬에서부터 외직(外職)인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6백 여명의 명신현관을
배출해 낸 대구서씨는 그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학덕과 문행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말에 와서도 개화부국강병을 위하여 헌신한 인사와 구국운동의 대열에 앞장서서
의병장으로 신명을 바친 훌륭한 인재가 대거 배출되어 명문 대구서씨의 가통을 지켰다.
집성촌으로는 전북 익산군 망성면 장성리, 경남 의창군 내서면 천계리, 경북 달성군 일원,
상주군 일원, 경북 청도군 각남면 신당동, 경북 고령군 개진면 오사동, 함남 흥원군 용원면 도용리 등이 있다.
고려때 군기사 소윤을 역임했던 시조 서한의 묘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 있다.
[인구] 1985년 남한에 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이보다는 더 많을것으로 예상된다.
[항렬표]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원(源) 동(東) 덕(德) 규(逵) 진(鎭) 영(永) 모(模)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열(烈) 세(世) 선(善) 한(漢) 계(桂) 경(慶) 기(基) 용(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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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서씨(扶餘徐氏)
[유래]
부여(扶餘)는 충청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소부리(일명 사비)인데
경덕왕때 부여현으로 개칭, 1914년 부여군이 되었다.
부여서씨(扶餘徐氏)는 백제 의자왕의 셋째아들 태자 융(隆)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조선씨족통보]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서수손(徐秀孫)으로 되어 있으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부여융(扶餘隆)으로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의 태자이며,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으나,
[부여서씨세보]에 의하면 660년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계백의 황산벌혈전을 마지막으로 패하고,
의자왕은 태자 등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 무장 소정방에게 압송되어 그곳에서 죽으니,
당제(唐帝)는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의 품계를 내리고 의자왕의 아들 융(隆)에게는
당고종(唐高宗)이 서씨(徐氏)의 성을 하사하고 능진도총에 임명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여서씨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으나 그 후대는 실전되어 알 수 없으며.
고려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태원군에 봉해진 그의 후손 존(存)이 중시조, 또는 1세조로 받들어지며,
그리고 수손(秀孫)은 그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후손들이 원래 성씨인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선조때 문무를 겸재한 현신으로 유명했던 익(益)이
군수를 지내고 종부시 첨정으로 순문관이 되어 북방 경비를 맡았으며, 이율곡을 구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이 화를 입었고, 시조(時調)를 잘하여 명망이 높았다.
한편 익의 아들 6형제중 장남 용갑(龍甲)이 선조때 영양 현감과 덕천 군수을 지내고,
광해군때 사색당파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계축 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네째 아우인 양갑(羊甲)과 함께 화를 입었고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필원의 아들로 목사를 지낸 경조(敬祖), 의금부 도사 정훈(正勳),
사헌부 감찰 계훈(啓勳), 돈령부 도정 운휘(雲輝), 석조(錫祚) 등이 유명했으며,
호조정랑 규달(逵達)은 현감을 진문(鎭文), 공조참판 무덕(武德)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집성촌은 평남 개천군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 1985년 인구조사에서 남한에 총 3,032가구, 13,0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항렬표]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진(鎭) 록(祿) 영(榮) 훈(勳) 기(基) 선(善) 승(承)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식(植) 형(炯) 배(培) 현(鉉) 창(昶) 석(晳) 유(裕)
40세 41세 42세 43세
세(世) 용(鎔) 윤(潤) 수(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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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서씨(連山徐氏)
[유래]
연산(連山)은 충청남도 논산군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군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연산으로 고쳤고, 1914년 논산군에 합해져
지금은 논산군에 속한 연산면으로 남아있다.
연산서씨(連山徐氏)의 시조 준영(俊英)은 서신일(이천서씨의 시 조)의 후손으로
누대에 걸쳐 세거해 온 연산지방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나 고증할 문헌이 없어 상고하지 못한다.
그후 연산서씨는 준영의 아들 보(寶)의 후대에서 세계가 실전되어 조선조에서 참군을 지낸
후손 의민(義敏)을 1세조로 받들고 세계를 이어오면서 2세손 종수(宗秀)가 현감을 지내고 가세를 일으켰다.
종수(宗秀)의 아들 연(憐)은 19세 때 무과에 장원하여 제주판관으로 나가 10대 명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제주도에는 한라산 석굴에 큰뱀이 있어 풍우조화를 부린다고 하여 사신(蛇神)을
숭배하는 관습이 있었다. 심지어는 사신을 모시지 않으면 불행이 닥친다고하여 시집까지
꼭 신주를 옮겨다가 모시곤 하여 폐해가 극심하였다.
그는 제주 판관으로 나가 이 사신당(蛇神堂)을 두들겨 부수고 민심을 안정시켜 도민들이
송덕비를 세웠고, 지금까지도 제주 남부에 사는 사람들은 사신당을 숭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후 연(憐)의 아들 천령(千齡)과 증손 후적(後積)도 현감을 역임하여 가통을 이었고,
부사로 나갔던 택선(宅善),윤박(潤璞)과 수군절도사 간세(幹世), 판관 병덕(秉德)이 유명했으며,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승태(承台)가 광천(廣川)에 덕명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헌신했으며, 기환(基煥)은 민종식과 함께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접전중
순절하여 연산서씨를 대표했다. 
집성촌으로는, 충남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대정리 등이 있다.
[인구] 남한에 총1485가구, 63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1985년)
[항렬표]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기(基) 석(錫) 승(承) 모(模) 용(容) 철(喆) 종(鍾)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원(源) 인(寅) 섭(燮) 정(廷) 진(鎭) 영(泳) 목(穆)
수(洙) 상(相) 열(烈) 규(圭) 호(鎬) 태(泰) 근(根)
28세 29세 30세
연(然) 곤(坤) 현(鉉)
희(熙) 균(均) 용(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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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利川徐氏)
[유래]
이천(利川)은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남천현(일명 남매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무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때 이천군이라 하였다.
1257년 영창현이라 개칭하였고 공양왕때 남천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조선조에 와서 다시
이천현으로 격하되었으며, 그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씨(徐氏)의 대종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52대왕인 효공왕때 아간대부를
지내다가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희성(복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스스로 처사라 칭하고 후진훈도에 여생을 바쳤으며,
그래서 후손들이 이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그의 후손에서 달성, 장성, 연산, 남평, 부여, 평당, 대구 등의 여러본으로 분적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동국만성보]와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서신일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의 윗대 조상인 서두라(徐豆羅)는,
신라(新羅)개국공신으로 아성(阿城 : 利川城의 옛이름)대장군(大將軍)으로 있었고,
천품이 인자중후한 서신일(徐神逸) 대에 이르러 산촌(山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겨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므로,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먹이를 주며 극진히 간호해 준 다음 다시 산으로 놓아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의 산신령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그대의 집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대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대의 자손이 세세(世世)로 재상(宰相)을 지내리라"고 했다.
나이 80이 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그는 그날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고려 초기에 국기를 확립했던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요,
서필의 아들이 바로 고려 성종때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략가로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이다.
고려 광종때 대광내의령이었던 필(弼)은 항상 솔직한 간언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특히 그는 광종의 지나친 사치스러운 생활과 귀화한 중국인을 우대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왕이 말을 관리하던 신하를 죽이려 하자, 공자가 마굿간에 불이 났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물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왕에게 간하자 이를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서희(熙)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話術)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한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의 자연적인 경계로 확정짓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국사상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희(熙)의 아들은 덕종때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임명되고 자손에게 영업전이 하사된 눌(訥)과
우복야를 지낸 유걸(惟傑), 유위(惟偉 : 장야서령), 주행(周行) 등으로
그중에서 유걸과 유위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선종때 중서시랑평장사로 상주국이 되었던 정(靖)은 유걸의 아들이며, 그의 손자 순(諄)이
판비서성사에 올라 강직하기로 유명했으며, 유위의 현손 견(甄)은 절신으로 이름났다.
조선조에 와서는 밀직사 원(遠)의 아들 선(選)이 좌군도총제를 거쳐 우의정에 추증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판사재 감사 효손(孝孫)의 증손 강(崗)은 [세종실록]과
[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세조때는 예문관 직제학에 올라 눈부신 업적을 남겼으나
세조의 숭불(崇佛)을 논란하다가 파직되었다.
한편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던 기(起)는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우고,
전국을 돌며 민속과 실용적 학문연구에 전심했으며, 특히 고향인 홍주의 풍속이 타락해짐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바로잡고자 마을에 강신당을 지어 풍속개량에 앞장섰으나
심한 저항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지리산 홍운동으로 들어가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후에 계룡산 고청봉으로 옮겨 가서 후진 교육에 진력했다.
임진왜란때 함흥과 홍원에서 대첩을 거두었던 경충 (敬忠)은 정유재란에도 전공을 세워
충무위 좌부장에 올랐으며, 득천(得 天)과 사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때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사원의 아우 사적(思迪)은 아버지와 형이 전사하자 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월성의 금장산, 선산의 금오산, 형산강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화왕산성 방어에
공을세워 3부자가 크게 명성을 떨쳤다.
내의령(內議令) 서필(弼)의 아들인 장위공 서희(徐熙) 장군의 자(字)는 염윤(廉允),
호(號)는 복천(福川), 시호(諡號)는 장위(章威),
-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 한다.
집성촌은, 경기도 이천군 부본면 일원,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영동리
전북 정읍군 이평면 마항리, 경북 월성군 일원, 전남 무안군 일원,
나주군 봉황면 일원, 경북 군위군 군위면 대북동, 전남 함평군 학교면 일원, 함남 홍원군 일원
[인구] 1985년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4,156가구, 144,2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항렬표(行列表) 
감무공<린>파(監務公<鱗>派) 주: 린(鱗)부터 기일세(起一世)하였음
世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항렬자 상 렬 재 종 순 걸 준 병 흠 해 식 현
行列字 相 烈 在 鍾 淳 杰 埈 炳 欽 海 植 炫
世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항렬자 균 호 태 동 형 배 일 구 주 섭 곤 탁 영
行列字 均 鎬 泰 東 炯 培 鎰 求 柱 燮 坤 鐸 永
양경공<유>파(良景公<愈>派) 주: 시조 아간공부터 기일세함
世 항렬자 行列字
27 만·종 萬·鍾
28 구·량 九·亮
29 상·운 商·雲
30 은·하 殷·河
31 성·무 成·茂
32 범·기 範·紀
33 강·용 康·鏞
34 장·택 章·澤
35 정·성 廷·聖
36 규·발 揆·發
37 효·교 孝·敎
38 겸·건 謙·健
39 인·연 寅·演
40 경·흥 卿·興
41 진·근 振·根
42 민·구 民·龜
43 남·헌 南·獻
44 래·수 來·洙
48 준·현 峻·鉉
45 중·재 重·載
46 유·준 猷·遵
절효공<릉>파(節孝公<稜>派) 주: 절효공 릉(稜)부터 기일세함
世 항렬자 行列字
31 재·증 載·增
32 종·상 鍾·商
33 순·원 淳·源
34 식·휴 植·休
35 현·병 顯·炳
36 규·재 圭·在
37 진·일 鎭·鎰
38 수·연 洙·淵
39 상·주 相·柱
40 희·중 熙·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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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서씨(長城徐氏)
[유래]
중시조 서릉은 시조인 서신일의 11대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때 시중을 지내고 장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이천 서씨에서 분관하여 장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인구] 6,381명이 있다.(1985년)
[항렬표]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정(挺) 연(衍) 진(震) 열(烈) 재(載) 종(鍾) 순(淳) 식(植)
현(鉉) 영(泳) 동(東) 섭(燮) 증(增) 상(商) 원(源) 휴(休)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현(顯) 규(圭) 진(鎭) 수(洙) 상(相) 희(熙) 요(堯)
병(炳) 재(在) 일(鎰) 연(淵) 계(桂) 훈(薰) 경(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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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당(봉성) 서씨(平當 徐氏)
[유래]
시조 서준방(徐俊邦)은 서신일의 후손으로 고려때 형부상서로 있으면서,
외저침입때에 공을세워 봉성(평당, 파주)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평당(봉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인구] 258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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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로서 이름을 빛낸 사람은 고려 초기의 서희(徐熙, 942-998년) 장군이 있습니다.
서희 장군은 도시조인 서신일(徐神逸)의 손자로서 이천서씨입니다.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자 홀로 적진(敵陣)에 들어가
외교적 담판(談判)을 지어 돌려보냈으며, 다음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용주, 흥화진, 통주, 철주, 구주, 곽주 등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 이남의 옛 고구려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유명한 학자로는 조선 중종 때의 서경덕(徐敬德, 1489 - 1546)이 있습니다.
호는 화담(花潭)이며,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3절이라 불리웠습니다.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을 제창하였고,
학문적 명성이 높아 멀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습니다.
근대의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서재필(徐載弼, 1866-1951)이 있습니다.
서재필은 달성서씨로서 젊은 시절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파 인물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뒤 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귀국후 1896년 한국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일제침략기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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