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 본 독도
( 이사부 장군의 독도기록보다 더욱더 빠른 기록)
-서론(序論)-
현재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함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분노하고 일본인들을 증오하며 또한 독도에 관한 사랑으로 물결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소위 냄비근성이라 하는
열기가 뜨거울땐 뜨겁다가도 식을땐 열혈같이 빨리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올해 2005년은 우리나라 역사가 시작된지 4338년 되는 해이고 ,
그리고 더불어 11월 17일은 을사늑약 100주년의 날이다
현재 독도사랑지킴이의 부클럽장을 맡고있는 필자(筆者)는 중국(中國)의 역사에
관심히 지대하게 많고 또한 한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클럽을 학술(學術)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촐한 토론문을 하나 써보고자 한다.
- 본론(本論)-
-중국(中國)의 사서(史書)는 독도를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찾아볼수 있는 독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생존했던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三國志)에서
찾아볼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조조 , 유비 , 손권 등의 활약이
돋보이는 삼국지(三國志)이다.
-삼국지(三國志)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삼국지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나관중은 수호지 , 삼국지 등 많은 작품을 우리에게 남겼는데
소설이 모두 그렇듯이 허구가 많은 것이 그 특징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국지(三國志)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아니라 진나라의 무제(武帝:사마염)가 재위할 때 치서어사를 지낸
진수 라는 사람이 쓴 사서(史書:역사서)이다
진수의 아버지는 촉나라의 대장 마속이 진창에서 장합에게 패배한후
마속은 참수당하고 그 부관이었던 진수의 아버지가 머리를 깍이는
형벌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태사공(사마천). 반고,범엽,등과 더불어 중국의 사학(史學)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다
흔히 우리들은 이 삼국지(三國志)를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라고 한다
-삼국지에 기록된 독도에 대한 기록은 ? -
삼국지는 , 위서(魏書) , 촉서(蜀書) 오서(吳書)로 나뉘어져있으며 이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 바로 동이전 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흔히 위지동이전이라고 한다.
이 기록에는 고구려, 부여 등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지리에 관하여 기록되어있다
그렇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 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相婁>接. <相婁>喜乘船寇 ,<北沃沮>畏之, 夏月 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 凍, 船道不 <王 > 別遣追討宮, 盡其東界.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
이 기록에 대하여 번역한 기록을 살펴보자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이에 이르러 부딧쳤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포로와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함을 즐기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안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이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에 기록되어있는 기록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면 위나라의 관구검이 구려 라는 곳을 공격한것과 구려라는 곳을
공격해서 구려의 왕이 옥저로 달아났다는 것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구려는 어떤 나라인가 ?
위의 기록에서 구려(句麗) 라고 표기된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이다.
또한 구려 왕 궁이라고 표기된 것은 고구려의 왕 동천왕 이다.
동천왕의 어릴때 이름은 교체 , 그후의 이름은 위궁(位宮) 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위나라의 대장 관구검이 쳐들어온 것은 아마도
위나라의 대장 관구검이 고구려의 환도성을 공격했을 때를 뜻한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환도성은 동천왕의 아버지 산상왕(연우)이 쌓은 도읍지 였는데 관구검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므로 동천왕은 북옥저로 말머리를 돌려 도주하였다.
위나라의 왕기라는 장수가 달아난 동천왕을 추격하여 북옥저에 이르렀는데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왕기가 늙은노인에게 말하였다.
“ 이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
왕기의 물음에 늙은 노인이 대답하였다
“저희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습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또 그 사람이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고 합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고 합니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노인의 대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가 이글을 읽으실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읽기 편하게 수정했지만
이 늙은 노인의 대답에 독도에 대한 기록이 담겨져 있다.
일단 첫 번째로 옥저라는 나라는 현재의 동해에 걸쳐 번성했던 부속국가이다
물론 고구려의 속국에 지나지는 않았지만 여러 문화로 우리에게 일찍이
알려져있다.
위나라의 장군 왕기가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늙은노인이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울릉도를 지칭하는 대답일 것이다.
옥저가 동해부근이고 바다의 동쪽에 하나의 섬이 있다고 했으니
울릉도 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이 기록은 중 이미 예전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동천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3세기 였으니 512년 하슬라군의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시기보다 300년은 빠른 기록이다
이당시 중국(中國)은 삼국시대(三國時代)였고 우리나라 역시 삼국시대(三國時代)였다
- 참고 자료 -
삼국지(三國志) 정사(正史) 위지동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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